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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디지털 카피라이팅

스타 카피라이터 클로드 홉킨스는 누구?

by 좋은&사람 2019.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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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광고의 과학화를 선도한 인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미국 광고계를 대표하는 스타 카피라이터였던 그는,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다양한 제작 및 조사기법을 창안하고 확산시켰다. 광고비평가 트위첼은 홉킨스를 소설로 따지자면 찰스 디킨스 같은 인물이며, 미술로 따지자면 파블로 피카소 같은 사람이라고 칭송한다.

그가 광고 산업 발전에 미친 압도적 영향력 때문이다.

1. 개인사

소비자 분석과 시장조사기법을 체계화해 광고를 과학화한 클로드 홉킨스(Claude C. Hopkins, 1866∼1932) 

클로드 홉킨스(Claude C. Hopkins : 1866∼1932)는 1866년 4월 24일 미국 미시간주 힐스데일(Hilsdale)에서 침례교 목사의 손자이자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매우 빈한했다. 자서전 『마이 라이프 인 애드버타이징(My Life in Advertising)』에는 "어머니가 열 살 때 과부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1867년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미시간주 호적자료에는 그의 아버지 페르난도 홉킨스(Fernando Hopkins)의 사망 사실이 기록된 바 없다. 반면에 1880년 그의 어머니가 호주(head of household)로서 자식들을 부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라 많은 광고사가()들은 홉킨스의 고백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는 1870년대 말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신문배달, 전단지 배포, 과일행상 등을 전전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는 엄격한 신앙생활에 몰두했다.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정도였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 자체가 죄로 여겨졌다. 춤추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영화관에 드나드는 것은 악마가 하는 일에 속하는 것이라 배웠으니까." 이 같은 성장 경험은 그를 평생 동안 금욕적이며 운명결정론적인 캘빈주의(calvinism)에 기울게 했다.

정규 대학 진학은 가난 때문에 포기했다. 17세 때 집을 나와 서점직원으로 일하다가 주급 4달러 50센트를 받고 그랜드 래피즈 펠트 부츠회사(Grand Rapids Felt Boot Compnay) 보조 회계원으로 입사했다. 24세가 되던 1890년 2월 비셀 카펫 청소기 회사(Bissell Carpet Sweepers Company) 회계부서에 다시 들어갔다.

1883년 설립된 이 회사는 볼베어링, 스프링, 회전 솔 특허의 카펫 청소기를 대량생산해 주로 방문판매를 했다. 1890년이 되면 하루 생산량이 1000개로 늘어났고 1893년까지 200만 대의 누적판매 대수를 기록할 정도로 제품이 잘 팔렸다. 이에 따라 뉴욕, 보스턴, 런던, 파리, 함부르크 등 세계 각지에 지사를 개설하고 광고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이것이 그에게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비셀은 당시 최고 명성의 카피라이터 존 파워스(John Powers)에게 카펫 청소기 팸플릿 카피를 맡겼다. 하지만 홉킨스가 보기에 제품과 시장 환경에 대한 분석이 매우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상사인 부사장 찰스 주드(Charles B. Judd)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이런 카피로는 절대 청소기를 못 팝니다. 주부들이 물건을 사도록 끌어들이는 말이 한마디도 없잖습니까? 제게 사흘만 시간을 주면 우리 문제점을 속속들이 파악한 새로운 팸플릿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새로운 카피를 썼고 그것이 채택되었다(Hopkins, 1997).


이후 시카고에 있는 육류회사 스위프트 앤 컴퍼니(Swift & Company)와 위스콘신 라시네(Racine)의 닥터 슙스 특허약품 회사(Dr. Shoop's Patent Medicine Company)의 광고책임자로 일하다가,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독립했는데 금방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07년 그는 앨버트 라스커(Albert Lasker)의 집요한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여 광고회사 로드 앤 토머스(Lord & Thomas)에 주급 1000달러를 받고 입사하게 되는데, 후일 18만 5000달러까지 연봉이 수직상승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200만 달러를 넘는 거액이다. 그는 18년 동안 근무하면서 이 회사를 미국 최고의 광고대행사로 성장시켰다.

홉킨스는 일벌레로 유명했다. 새벽까지 일을 하는 것이 예사였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없어 조용하다는 이유로 일요일 근무를 더 좋아하기도 했다. 이 같은 부지런함에 더해 순발력 있는 카피라이팅과 창조 능력을 겸비한 천재적 인물이었다. 광고주 방문 후 하루 만에 탁월한 캠페인 전략과 카피를 완성시킬 정도였다.

혀 짧은 소리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자기 카피에 대해서는 오만할 정도의 확신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팹소던트(Pepsodent) 치약, 팜올리브(Pamolive) 비누, 반캠프(VanCamp) 식품, 굿이어(Goodyear) 타이어 등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수많은 명작 캠페인을 통해 '물건을 파는 광고'의 모범을 제시했다.

1924년 다시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겸 마케팅 컨설턴트로 독립해 미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광고인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그는 말년이 되어 시카고 교외에 2분의 1마일 크기의 정원과 호수가 있는 대저택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수줍고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얼굴 뒤에는 구두쇠에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냉혈한의 본질이 숨어 있었다. 광고인의 도덕성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지녔던 레이먼드 루비캄(Raymond Rubicam)은 평생 그를 싫어했다 한다. 홉킨스가 '물건을 팔기 위해서라면 도덕적 비난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판매지상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Ogilvy, 1983). 하지만 그를 전설적 카피라이터로 칭찬하든 비도덕적 인물로 욕하든 간에 클로드 홉킨스가 현대 광고의 발전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2. 선제적 리즌 와이

홉킨스는 하드셀(hard sell) 소구의 일종인 선제적() 리즌 와이(pre-emptive reason why) 기법을 창안한 인물이다. 원래 리즌 와이(reason why)는 존 케네디(John E. Kennedy)가 주창한 것인데, 카피 위주의 논리적 전개를 통해 제품 효용성과 경쟁우위를 강조하는 표현방식이다. 이 기법은 제품 및 서비스의 편익, 가격, 시험결과, 특이 성분 등을 제시해 "왜(why)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입해야 하는가의 이유(reason)"를 직접적, 명시적으로 밝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선제적 리즌 와이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경쟁 제품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특성을 남보다 먼저 강조하고 확보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자사 제품만의 장점인 양 각인시키는 표현방식을 뜻한다. 이 기법은 그가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시절 만든 슐리츠 맥주(Schlitz Beer) 캠페인에서 최초로 구체화되었는데, 광고 카피에서 "증기로 (병을) 세척했다"고 강조했다. 언뜻 보면 슐리츠만이 위생적 증기세척 기술을 보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기술은 당대의 모든 맥주회사가 공통적으로 실행하던 것이었다.

경쟁사 및 시장환경을 철저히 연구했던 홉킨스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를 마치 고유 기술인 것처럼 강조함으로써 자기들만의 '독점적 순수성(absolute purity)'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또 다른 히트작인 반캠프(VanCamp) 돼지고기 콩요리(pork and beans) 광고에서는 화씨 245도에서 익혔다고 강조했는데, 역시 경쟁 회사와 동일한 제조법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쟁제품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특성을 자기만의 것으로 선점하는 이 같은 방식이 도덕적으로 떳떳하다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홉킨스는 20세기 초반 막을 연 치열한 브랜드 경쟁 속에서, 선제적 리즌 와이를 통해 공격적 광고 캠페인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가 그를 현대 광고사에서 판매지상주의적 강압() 소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인물로 평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제적 리즌 와이 기법은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었는데, 특히 1950년대를 풍미한 USP(Unique Selling Proposition) 전략이 이를 방법론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라 할 수 있다.

3. 광고의 과학화

홉킨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광고는 크리에이터의 직관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의 손으로 소비자 분석, 시장조사기법 등이 체계화됨에 따라 현대 광고는 막연한 창조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는 광고를 예술의 형태가 아니라 설득의 과학으로 확신했다. 카피를 쓰기 전에 시장환경과 소비자 욕구를 조사했고, 광범위한 문헌연구를 실행했다. 매체 집행 전 다양한 테스트를 했고 집행 후 반복적으로 광고 효과를 검증했다. 그가 하드셀 소구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Schorman, 2008).

펩소덴트(Pepsodent) 치약 광고는 추론보다 조사를 중시하는 이 전설적 카피라이터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난 사례다. 그는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당시 미국에서 출간된 치과 관련 서적을 모두 읽었고, 결국 이에 생기는 막(film), 즉 '플라크' 제거라는 핵심 콘셉트를 찾아냈다.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그의 카피라이팅은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광고사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는 미국 대학에 광고 전략, 크리에이티브 제작, 마케팅 조사 등의 과목이 공식으로 개설되었고 광고구독률 조사, 테스트 마케팅 등 초기 조사기법들이 도입되었다.

그는 이 같은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다. 로드 앤 토머스 시절 환불보증제나 우편주문(mail order) 같은 새로운 마케팅기법을 개발했고 무료 샘플(free samples), 회신용 쿠폰을 사용한 효과 조사 등을 광고계 최초로 도입했다. 오랜 체험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가 제품 판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일찌감치 인식한 선구적 인물이기도 했다(Ogily, 1983).

1923년 출간한 『사이언티픽 애드버타이징(Scientific Advertising)』은 창작 원칙, 심리학, 전략 수립, 예산 설정 등에 걸쳐 광고 과학화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그가 체계화시킨 과학적 광고의 원칙과 실천은 20세기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발전에 이정표를 제시했다. 특히 후일 로서 리브스(Rosser Reeves)와 데이비드 오길비의 광고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대표작

홉킨스는 프리랜서 시절에도 당대 최고 수준의 카피라이터였지만 로드 앤 토머스 입사 후 광고사에 남을 거장의 위치로 올라섰다. 그의 작품은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카피, 기능적이며 간명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구성된 전형적 하드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제품을 철저히 분석하고 시장 상황 및 소비자 욕구를 이해할 것, 그리고 경쟁우위적 편익에 기초해 제품 구입 이유를 정확하게 전달할 것, 이것이 홉킨스 크리에이티브의 ABC였다. 선키스트 오렌지 광고가 대표적 사례다.


이 캠페인은 오렌지 산업의 명운을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1910년 로드 앤 토머스에서 선키스트(Sunkist)를 영입했을 당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오렌지 농가는 소비침체와 과잉생산 때문에 장기불황에 시달렸다. 그는 소비자 조사를 통해 사람들이 오렌지의 달콤새콤한 맛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껍질 제거 때 즙 때문에 손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순간 인류가 오렌지를 먹어온 오래된 습관을 바꾼 발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렇게 과즙이 풍부한 오렌지를 까서만 먹지 말고 주스를 만들어 마시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오렌지 주력 구매층인 주부들을 대상으로 집행된 이 작품은 "오렌지를 마시자(Drink Orange)"라는 헤드라인(headline)과 과즙 추출기에 오렌지를 압착하는 비주얼로 구성되었다. 바디카피(bodycopy)에서는 선키스트 오렌지가 소화를 도와주고 건강을 유지시키는 자연 음료(all natural liquid)임을 강조하고 있다.


광고는 즉각적으로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주부들이 너도나도 집에서 주스를 만들어 마시게 되었고, 미국 내 오렌지 매출이 50퍼센트 이상 급상승했다(Cruikshank & Schultz, 2010). 나아가 현대인의 식생활에 오렌지주스는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오렌지주스 산업은 막대한 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의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자,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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